2.21골→3.12골… 월드컵 ‘골 잔치’ 변수 된 공인구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공식구 ‘자블라니’를 두고 “이 공으로 월드컵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혹평했다. 세계적 대회에 쓸 만한 수준의 공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자블라니는 지나치게 매끈한 표면 때문에 공의 움직임이 불규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공을 막아야 하는 골키퍼는 물론 골을 넣어야 하는 공격수도 불만을 쏟아냈다. 슛을 해도 공이 원하는 대로 날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월드컵 경기당 평균 득점은 2.27골에 그쳤다. 월드컵 역사상 두 번째로 낮은 수치였다. 사상 최저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2.21골이었다.
지금 흐름은 사뭇 다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경기당 평균 2.64골,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2.69골이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조별리그 1차전 24경기에서 75골이 나와 경기당 평균이 3.12골까지 뛰었다. 경기당 평균 3.6골을 기록한 1958년 스웨덴 대회 이후 68년 만에 가장 많은 득점이다. 최근 월드컵 초반 흐름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이번 월드컵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은 골이 터진 경기는 지난 14일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조별리그 E조 독일-퀴라소의 경기다. 7대1로 모두 8골이 나왔다. 이어 F조 스웨덴-튀니지·네덜란드-스웨덴(각 5대1), B조 캐나다-카타르(6대0), L조 잉글랜드-크로아티아(4대2) 경기에서 각각 6골이 나왔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특징은 중거리슛 득점이 늘었다는 점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집계 결과 이번 대회 조별리그 1차전에서 나온 75골 가운데 16%인 12골이 페널티지역 밖에서 나왔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같은 시점에는 중장거리 슛 득점이 하나도 없었다고 FIFA는 설명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페널티지역 안에서 세밀하게 만들어 넣는 골뿐 아니라 수비가 자리를 잡기 전 바깥에서 빠르게 때리는 슈팅이 득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 매체 AS는 1차전 장거리 골을 따로 분석하며 프랑스 킬리안 음바페의 세네갈전 득점이 28.0m 거리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호주 코너 멧칼프(23.4m), 스웨덴 야신 아야리(22.7m·22.6m), 모로코 이스마엘 사이바리(22.6m)의 골까지 최장거리 득점 상위 5개골이 22m 넘는 거리에서 나왔다.
이번 월드컵이 ‘골 잔치’가 된 데는 공식구 변화도 주요 변수로 거론된다. 이번 월드컵 공식구 이름은 ‘트리온다’다. 일본 환태평양대 체육학부 아사이 다케시 교수는 분슌온라인 인터뷰에서 “표면이 매끈했던 2010년 대회 자블라니가 탁구공이라면 트리온다는 골프공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트리온다는 작은 홈으로 둘러싸인 골프공처럼 표면의 거칠기를 크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해 안정성과 제어력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공이 휘어질 때는 충분한 회전을 유지하면서도 지나치게 흔들리는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아사이 교수는 “골프공은 ‘딤플’이라고 불리는 표면의 작게 움푹 팬 부분이 핵심”이라며 “완전히 매끈한 공과 비교해 어느 정도 요철이 있는 공은 여러 속도 구간에서 공기저항이 낮아져 불안정한 움직임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골프공 표면에 오목하게 파인 작은 홈들은 주변 공기 흐름을 조절해 공을 더 안정적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한다. 트리온다의 표면 요철과 이음새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매끈한 공은 특정 속도를 넘겼을 때 공기 흐름 변화로 궤적이 갑자기 흔들릴 수 있다. 표면에 적절한 요철이 있으면 이런 변화가 더 일찍 일어나 궤적이 예측 가능해진다.
트리온다는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4개 패널 구조를 적용한 공식구다. 깊은 이음새와 표면 엠보싱을 넣어 비행 안정성을 높였다. 미국 과학 전문 매체 WIRED는 최신 연구를 인용해 트리온다가 코너킥이나 프리킥 같은 상황에서 이전 공들보다 안정적 궤적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연구는 ‘트리온다: 이전 FIFA 월드컵 공식구보다 강화된 표면 거칠기’라는 제목으로 응용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어플라이드 사이언시스’에 지난 3월 공개됐다. 미국 퓨젯사운드대 물리학과 존 에릭 고프 교수가 주도한 이 논문에는 아사이 교수와 홍성찬 서울여대 스포츠운동과학과 교수 등이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연구진은 트리온다를 2022 카타르 월드컵 공식구 ‘알 리흘라’, 2018 러시아 월드컵 공식구 ‘텔스타18’,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식구 ‘브라주카’, 2010 남아공 월드컵 공식구 ‘자블라니’와 함께 분석했다. 공을 풍동(바람이 지나가는 통로) 안에 고정한 뒤 바람 속도를 바꿔가며 공에 작용하는 공기저항, 좌우 방향 힘, 위아래 방향 힘을 측정했다. 이후 측정값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넣어 공이 실제로 차였을 때 어떤 궤적으로 날아갈 수 있는지를 비교했다.
논문을 보면 트리온다는 5개 공 가운데 가장 낮은 속도에서 표면 요철이 공기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공이 갑자기 흔들리는 현상을 줄이고 더 예측 가능한 궤적으로 날도록 표면 구조를 다듬었다는 의미다. 다만 회전이 없는 조건에서는 길고 빠른 킥의 비거리가 일부 직전 공식구보다 조금 줄어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멀리 날아가는 공은 아니라는 얘기다.
공식구 개발 초점이 안정성과 제어력 향상에 맞춰진 계기는 16년 전인 2010 남아공 대회 공식구 자블라니에 대한 혹평이었다. 자블라니는 당시 예측하기 어려운 궤적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아사이 교수는 “자블라니는 공기저항이 더 작아져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이게 됐다”며 “표면이 지나치게 매끈하면 불규칙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쉽다”고 설명했다.
월드컵 공식구 5종 대상 실험에서 공 주변 공기저항이 바뀌는 문턱(임계속도)은 자블라니가 가장 높았다. 임계속도가 높을수록 경기 도중 자주 나오는 속도대에서 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릴 가능성이 커진다. 자블라니의 임계속도는 공을 두 방향으로 놓고 측정했을 때 각각 시속 약 79㎞, 97㎞였다. 두 방향 모두 시속 43㎞로 일정하게 나타난 트리온다의 2배 수준이었다. 알 리흘라, 텔스타18, 브라주카 등 나머지 3종은 시속 약 50~64㎞ 범위에 있었다.
월드컵 공식구 설계는 다음 대회인 2014 브라질 대회부터 안정성과 제어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브라주카는 표면에 요철을 늘리고 공기 흐름을 조절해 더욱 예측 가능한 궤적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풍동실험에서 브라주카의 임계속도는 시속 57㎞, 54㎞로 자블라니와 비교해 크게 낮아졌다.
자블라니의 ‘예측하기 어려운 궤적’은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다. 패널 수를 줄여 공을 더욱 매끈하게 만든 자블라니는 공개 당시 월드컵 사상 가장 둥근 공으로 소개됐다. 동시에 더 정확하고, 더 안정적으로 날아가는 공으로 홍보됐다. FIFA 자료에서 월드컵 공인구 제작사 아디다스는 8개 열접합 3D 패널과 표면 홈 기술이 공의 제어력과 비행 안정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월드컵 공식구는 더 둥글게, 더 가볍게, 더 정확하게 날아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공을 완전한 구형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과제였다. 그 기준으로 보면 자블라니는 가장 완벽한 형태였다.
1930년 제1회 월드컵 때는 통일된 공식구조차 없었다. 결승전에서는 전반과 후반에 서로 다른 나라의 공을 사용했다. 전환점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다. 아디다스가 공식구 공급을 맡으며 처음으로 이름을 붙인 공 ‘텔스타’가 등장했다. 검은색 오각형과 흰색 육각형을 조합한 32패널 구조의 공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축구공 이미지도 여기서 시작됐다.
흑백 디자인은 미관 때문만이 아니었다. 컬러TV가 보편화하기 전이라 중계 화면에서 공을 더 잘 보이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디자인은 1994 미국 월드컵 공식구 ‘퀘스트라’까지 30년간 이어졌다. 32장 패널 구조는 2002 한일 월드컵 ‘피버노바’까지 계승됐다. 다음 전환점은 2006 독일 월드컵이었다.
독일 월드컵 공식구 ‘팀가이스트’는 기존 손바느질을 대신해 패널을 열로 압착하는 열접합 기술이 사용됐다. 패널 모양도 오각형·육각형 조합에서 14장 프로펠러 모양 패널로 바뀌었다. 바느질 방식에서 열접합 방식으로 바뀌면서 완전한 구형에 더 가까워졌다. 당시 FIFA는 둥근 정도의 오차가 1% 미만이라고 설명했다. 바느질선이 사라지면서 방수성도 크게 향상됐다.
다시 4년 뒤에는 패널 수를 불과 8장으로 줄인 공식구가 등장했다. 표면은 더 매끈해졌다. 자블라니였다. 스페인 대표팀 골키퍼였던 카시야스는 “비치볼 같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 뒤로도 패널 수는 꾸준히 줄었다. 2014년 브라주카와 2018년 텔스타18는 6개였다. 2022년 알 리흘라에서 20개로 늘었다가 올해 트리온다에서 4개로 다시 줄었다. 월드컵 공식구 가운데 가장 적다.
득점 증가를 공식구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올해는 월드컵 참가국이 48개국으로 늘면서 전력 차가 큰 경기들이 생겼다. 공격 전술은 더 정교해졌다. 선수들의 슈팅 기술과 피지컬도 과거보다 향상됐다. 여기에 공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골이 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아사이 교수는 “선수와 공, 각각의 진화가 맞물리고 있다”며 “예전 같으면 큰 동작이 필요했던 슈팅도 이제는 짧은 동작으로 강하고 정확하게 찰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